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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랜드 차르국 Саландско Царство Tsardom of Saland | |||
국기 (1907-1917)[1] | 대형 국장 | ||
정부기 (1762-1907) | 소형 국장 | ||
Богъ чува Саландъ![2] 하느님께서 사랜드를 지키시노라! | |||
상징 | |||
국가 | Молитва за Цара 차르를 위한 기도 | ||
위치 | |||
711년 ~ 1917년 3월 16일 | |||
칭제 이전 | 멸망 이후 | ||
역사 | |||
지리 | |||
인문 환경 | |||
정치 | |||
경제 | |||
통화 | |||
언어별 명칭 |
1. 개요 [편집]
제정 사랜드(帝政-, 사랜드어: Саландско Царство 살란드스코 차르스트보), 정식 국호 사랜드 차르국은 711년 인크론슈타트 공작 인터르스키 1세가 남랜드 평원을 통일하고 차르를 칭한 때부터 1917년 장미 혁명으로 군주정이 무너질 때까지 1,206년 동안 존속한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네 왕조가 차례로 제위를 이었지만 차르 칭호와 '사랜드'라는 국체는 끝까지 유지되었다. 말기의 판도는 오늘날 사비에트 전역과 북부 고원의 고랜드를 아울렀다.
'사랜드'는 고랜드 시대에 고원 아래 저지대를 일컫던 '아랫땅'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인터르스키 1세는 3세기 로마의 침략으로 무너진 고대 사랜드 제국의 계승을 내세워 차르를 칭했으나, 두 나라 사이에는 400여 년의 분열기와 6~7세기 슬라브인의 대이주가 끼어 있어 혈통으로도 언어로도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제정의 지배층은 옛 사랜드인과 섞인 남슬라브계였고, 옛 사랜드어는 동남부 산지의 카스탄족에게만 남았다. '제정 사랜드'라는 이름은 이 나라를 고대 사랜드 제국, 1917년 이후의 사랜드 공화국, 1949년 이후의 사비에트와 구분하기 위해 쓰인다. '차르 사랜드'라는 표현도 가끔 쓰인다.
제정 초기의 차르들은 옛 제국의 동방 영역을 되찾으려 동쪽으로 원정해 8세기 중엽까지 동부 저지대의 제방 연합들로부터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789년 사무탁호를 둘러싼 빌베른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로는 약 300년 동안 이 늪지대를 두고 국경 분쟁을 되풀이했다. 13세기 중엽 몽골의 침입은 제정을 뿌리째 흔들었다. 1259년 수도 인크론슈타트가 함락되며 인크론슈타트 왕조가 끊겼고, 원은 비어 버린 동부에 고려인·화북 한인·열도인·대월인을 강제로 옮겨 훗날 북산과 동사랜드의 모체를 만들었다. 1291년 서부 변경의 영주 스테판 즐라토미르가 인크론슈타트를 되찾아 즐라토미로비치 왕조를 열었지만, 1321년 몬타나 화산 대분화와 1349년 흑사병이 겹치며 동부 저지대는 제정의 손을 완전히 떠났다.
1597년 즐라토미로비치 왕조가 후사 없이 끊기자 제위를 둘러싼 내란, 이른바 '혼란기'가 14년 동안 이어졌고, 1611년 귀족 회의가 추대한 보그단 1세가 스베토자레비치 왕조를 열었다. 보그단 1세는 1620년대 동쪽의 남꽝 왕국을 침공했으나 청평의 원군에 막혀 1627년 롱 강을 경계로 강화했고, 이 선은 오늘날 사비에트와 동사랜드의 국경으로 남았다. 동방 진출이 막히자 제정은 안으로 눈을 돌렸다. 1652년 반포된 대법전은 농민을 토지와 영주에게 묶는 농노제를 법으로 굳혔고, 1661년에는 건국자의 이름을 딴 서부의 신도시 인터그라드로 수도를 옮겼다. 1762년 궁정 정변으로 즉위한 여제 옐레나 1세는 벨로슬라비치 왕조를 열었고, 고대부터 이어진 고원 가장자리의 국경 분쟁 끝에 1784년 고랜드를 병합해 직할 현으로 편입하며 제정의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
근세 사랜드는 끝까지 농노제에 기반한 농업 제국이었다. 19세기에 페타르 3세를 비롯한 몇몇 차르가 농노 해방과 근대화를 시도했지만 토지와 농노를 쥔 귀족층의 반발에 번번이 좌초했고, 제정은 농노제와 전제정을 그대로 안은 채 20세기를 맞았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인터그라드에 총파업이 번지고 평원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마지막 차르 라자르 2세는 1907년 《국가기본법》을 공포하고 양원제 의회 사보르를 열었다. 하지만 차르가 의회를 수시로 해산하면서 입헌정은 형식에 그쳤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제정 사랜드는 러시아 제국과 함께 협상국 편으로 참전했다. 차르와 궁정은 이 전쟁을 제정의 위신을 되살릴 기회로 여겼지만, 농노 출신 징집병과 낡은 보급 체계로 치른 소모전은 재앙이었다. 1916년 흉작으로 인터그라드를 비롯한 대도시의 빵 배급이 끊겼고, 1917년 3월 인터그라드 방직공장 여공들이 붉은 장미를 가슴에 달고 거리로 나섰다. 진압 명령을 받은 수비대 일부가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3월 16일 라자르 2세가 퇴위했고, 711년 이래 1,206년 동안 이어진 제정은 막을 내렸다. 뒤이은 임시정부는 1918년 농노제를 폐지하고 1920년 사랜드 공화국을 정식으로 출범시켰지만, 공화국은 끝내 토지 문제를 매듭짓지 못했고 1949년 붉은 혁명을 거쳐 사비에트로 이어졌다.
'사랜드'는 고랜드 시대에 고원 아래 저지대를 일컫던 '아랫땅'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인터르스키 1세는 3세기 로마의 침략으로 무너진 고대 사랜드 제국의 계승을 내세워 차르를 칭했으나, 두 나라 사이에는 400여 년의 분열기와 6~7세기 슬라브인의 대이주가 끼어 있어 혈통으로도 언어로도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제정의 지배층은 옛 사랜드인과 섞인 남슬라브계였고, 옛 사랜드어는 동남부 산지의 카스탄족에게만 남았다. '제정 사랜드'라는 이름은 이 나라를 고대 사랜드 제국, 1917년 이후의 사랜드 공화국, 1949년 이후의 사비에트와 구분하기 위해 쓰인다. '차르 사랜드'라는 표현도 가끔 쓰인다.
제정 초기의 차르들은 옛 제국의 동방 영역을 되찾으려 동쪽으로 원정해 8세기 중엽까지 동부 저지대의 제방 연합들로부터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789년 사무탁호를 둘러싼 빌베른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로는 약 300년 동안 이 늪지대를 두고 국경 분쟁을 되풀이했다. 13세기 중엽 몽골의 침입은 제정을 뿌리째 흔들었다. 1259년 수도 인크론슈타트가 함락되며 인크론슈타트 왕조가 끊겼고, 원은 비어 버린 동부에 고려인·화북 한인·열도인·대월인을 강제로 옮겨 훗날 북산과 동사랜드의 모체를 만들었다. 1291년 서부 변경의 영주 스테판 즐라토미르가 인크론슈타트를 되찾아 즐라토미로비치 왕조를 열었지만, 1321년 몬타나 화산 대분화와 1349년 흑사병이 겹치며 동부 저지대는 제정의 손을 완전히 떠났다.
1597년 즐라토미로비치 왕조가 후사 없이 끊기자 제위를 둘러싼 내란, 이른바 '혼란기'가 14년 동안 이어졌고, 1611년 귀족 회의가 추대한 보그단 1세가 스베토자레비치 왕조를 열었다. 보그단 1세는 1620년대 동쪽의 남꽝 왕국을 침공했으나 청평의 원군에 막혀 1627년 롱 강을 경계로 강화했고, 이 선은 오늘날 사비에트와 동사랜드의 국경으로 남았다. 동방 진출이 막히자 제정은 안으로 눈을 돌렸다. 1652년 반포된 대법전은 농민을 토지와 영주에게 묶는 농노제를 법으로 굳혔고, 1661년에는 건국자의 이름을 딴 서부의 신도시 인터그라드로 수도를 옮겼다. 1762년 궁정 정변으로 즉위한 여제 옐레나 1세는 벨로슬라비치 왕조를 열었고, 고대부터 이어진 고원 가장자리의 국경 분쟁 끝에 1784년 고랜드를 병합해 직할 현으로 편입하며 제정의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
근세 사랜드는 끝까지 농노제에 기반한 농업 제국이었다. 19세기에 페타르 3세를 비롯한 몇몇 차르가 농노 해방과 근대화를 시도했지만 토지와 농노를 쥔 귀족층의 반발에 번번이 좌초했고, 제정은 농노제와 전제정을 그대로 안은 채 20세기를 맞았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인터그라드에 총파업이 번지고 평원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마지막 차르 라자르 2세는 1907년 《국가기본법》을 공포하고 양원제 의회 사보르를 열었다. 하지만 차르가 의회를 수시로 해산하면서 입헌정은 형식에 그쳤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제정 사랜드는 러시아 제국과 함께 협상국 편으로 참전했다. 차르와 궁정은 이 전쟁을 제정의 위신을 되살릴 기회로 여겼지만, 농노 출신 징집병과 낡은 보급 체계로 치른 소모전은 재앙이었다. 1916년 흉작으로 인터그라드를 비롯한 대도시의 빵 배급이 끊겼고, 1917년 3월 인터그라드 방직공장 여공들이 붉은 장미를 가슴에 달고 거리로 나섰다. 진압 명령을 받은 수비대 일부가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3월 16일 라자르 2세가 퇴위했고, 711년 이래 1,206년 동안 이어진 제정은 막을 내렸다. 뒤이은 임시정부는 1918년 농노제를 폐지하고 1920년 사랜드 공화국을 정식으로 출범시켰지만, 공화국은 끝내 토지 문제를 매듭짓지 못했고 1949년 붉은 혁명을 거쳐 사비에트로 이어졌다.
2. 상징 [편집]
2.1. 국기 [편집]
제정 사랜드 말기의 국기는 위에서부터 자주·금·백의 가로 삼색기였다. 자주는 고대 사랜드 제국에서 이어받았다고 여겨진 차르의 권위를, 금은 하느님과 정교 신앙을, 백은 평원의 백성을 뜻했다.
자주·금·백 삼색기는 1731년 스베토자레비치 왕조가 상선기로 지정하면서 처음 공식 기록에 나타났다. 이후 상인과 도시민 사이에 널리 퍼져 사실상 '백성의 기'로 자리잡았지만, 정부 기관과 군대는 1762년 옐레나 1세의 칙령으로 정해진 정부기, 곧 자주 바탕에 금색 그리핀을 넣은 깃발만 쓸 수 있었다. 차르의 깃발과 백성의 깃발이 따로 걸리는 이 이중 체제는 145년 동안 이어지다가, 1907년 《국가기본법》이 삼색기를 유일한 국기로 정하면서 끝났다. 정부는 이를 입헌정의 상징으로 선전했지만, 같은 법이 차르의 전제권을 거의 그대로 남겨 두었기 때문에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깃발만 입헌을 했다"고 비꼬았다.
차르기는 금색 바탕에 자주색 그리핀을 넣은 깃발로, 1858년 페타르 3세의 문장 개혁 때 정해졌다. 차르가 머무는 궁전과 차르가 탄 함선, 차르의 행차에만 게양했다.
2.2. 국장 [편집]
제정 사랜드 국장 | |
대형 국장 | |
중형 국장 | |
소형 국장 | |
제정 사랜드의 국장은 대형·중형·소형 세 가지였다. 1858년 페타르 3세의 문장 개혁 때 가장 화려하고 복잡한 대형 국장이 정해졌고, 이듬해 이를 간략화한 중형과 소형 국장이 차례로 나왔다.
국장의 중심은 자주색 방패 안에 앞발을 들고 일어선 금색 그리핀이다. 그리핀은 머리에 사랜드 차르관을 쓰고 오른 앞발에는 홀을, 왼 앞발에는 수문 열쇠를 쥐고 있다. 그리핀은 본래 고대 사랜드 제국의 수리 관청이 인장에 새기던 수호수로, 물길과 곳간을 지키는 짐승이었다. 인터르스키 1세가 고대 제국의 계승을 내세우며 이 짐승을 가문 문장 위에 얹은 뒤로, 네 왕조가 바뀌는 동안에도 그리핀만은 한 번도 문장에서 빠지지 않았다. 왼발의 수문 열쇠는 평원의 물길을 다스리는 자가 곧 평원의 주인이라는, 분수 전쟁 이래의 오랜 관념을 담은 것이다. 그리핀의 가슴에 박힌 작은 방패는 인크론슈타트 공작가의 문장으로, 자주 바탕에 은빛 성탑이 그려져 있다.
방패 위에는 인터르스키 1세의 것으로 전해지는 투구가 얹혀 있고, 방패 양옆으로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이 서 있다. 그 뒤를 흰 담비 털을 댄 자주색 망토가 덮으며, 망토 위에는 사랜드 차르관이 놓이고 망토 띠에는 표어 'Богъ чува Саландъ(하느님께서 사랜드를 지키시노라)'가 적혀 있다. 아래에서부터는 금빛 밀 이삭과 참나무 가지가 문장을 감싸고, 그 위에 인크론슈타트·인터그라드·평원 중부·서부 변경·북서 삼림·남부 해안·카스탄 산지·고원현 여덟 지방의 문장이 얹혀 있다. 대형 국장에는 이미 잃은 동부 저지대의 문장도 권리 주장의 뜻으로 함께 들어갔는데, 이 때문에 남꽝 왕국과 청평이 외교 경로로 항의한 일도 있었다.
제정 사랜드 역대 국장 | ||
~711 (인크론슈타트 공국) | 711~1259 | 1291~1597 |
1611~1762 | 1762~1858 | 1858~1917 |
2.3. 국가 [편집]
2.3.1. 일어나라, 그리핀이여! [편집]
〈일어나라, 그리핀이여!(Устани, грифоне!, 1784–1841)〉 |
1841년까지 불린 비공식 국가이다. 궁정 시인 바실리예 데스포토비치(Василије Деспотовић, 1741년 ~ 1809년)가 작사하고 마르코 일리치(Марко Илић, 1752년 ~ 1820년)가 작곡했다. 1784년 옐레나 1세의 군대가 고원의 아바나 요새를 함락하고 고원 병합을 마무리한 것을 기념해 지은 노래로, 이듬해 대관 기념일 연회에서 처음 불린 뒤 궁정 행사와 열병식에서 사실상의 국가로 쓰였다. 후렴에서 여제를 '사랜드의 어머니'로 찬양하는 탓에 남성 차르가 즉위한 뒤로는 후렴 가사를 바꿔 부르는 일이 잦았다.
- 가사 [펼치기ㆍ접기]
- 절사랜드어번역1Устани, грифоне златни,
Рашири крила надъ висомъ!
Пали су зидови горски,
Саландъ стои надъ брдомъ.일어나라, 황금빛 그리핀이여,
고지 위로 날개를 펼쳐라!
산의 성벽이 무너졌으니,
사랜드가 언덕 위에 섰도다.후렴Слава теби, Царице наша!
Слава, мати Саланда!영광을, 우리의 여제시여!
영광을, 사랜드의 어머니시여!2Видите, равнице широке,
Видите, воде бистре:
Одъ висова до мора
Едно срдце, една вѣра!보라, 드넓은 평원이여,
보라, 맑은 물길이여.
고지에서 바다까지
한마음, 한 믿음이로다!
2.3.2. 차르를 위한 기도 [편집]
〈차르를 위한 기도(Молитва за Цара, 1841–1917)〉 |
1841년 차르 미하일로 2세의 칙령으로 공식 국가가 되어 1917년 제정이 무너질 때까지 불렸다. 시인 요반 라도비치(Јован Радовић, 1798년 ~ 1866년)가 작사했고 궁정 악장 드라구틴 마르코비치(Драгутин Марковић, 1803년 ~ 1874년)가 작곡했다. 1907년 《국가기본법》은 이 곡을 국가로 명시했다.
장미 혁명 첫날 거리로 나선 여공들 가운데 상당수도 이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고 전한다. 사흘 뒤 같은 거리에서는 같은 곡조에 '차르' 대신 '빵'을 넣은 개사곡이 불렸다.
- 가사 [펼치기ㆍ접기]
- 절사랜드어독음번역1Боже вѣчни, Цара чувай!
Моћнога, праведнога,
Царуй намъ на славу!
Боже, Цара чувай!보제 베치니, 차라 추바이!
모치노가, 프라베드노가,
차루이 남 나 슬라부!
보제, 차라 추바이!영원하신 하느님, 차르를 지키소서!
강하시고 의로우신 분을,
우리의 영광을 위해 다스리소서!
하느님, 차르를 지키소서!2Царуй на страхъ душманима,
Царе православни!
Боже, Цара чувай,
Саландъ благослови!차루이 나 스트라흐 두슈마니마,
차레 프라보슬라브니!
보제, 차라 추바이,
살란드 블라고슬로비!원수들이 떨도록 다스리소서,
정교의 차르시여!
하느님, 차르를 지키소서,
사랜드를 축복하소서!
3. 역사 [편집]
상세 내용은 제정 사랜드/역사 문서 참고.
시대 | 기간 | 수도 |
711~1259 | 인크론슈타트 | |
몽골 점령기 | 1259~1291 | - |
1291~1597 | 인크론슈타트 | |
혼란기 | 1597~1611 | - |
1611~1762 | 인크론슈타트 → 인터그라드(1661) | |
1762~1917 | 인터그라드 |
711년 서부 평원의 인크론슈타트 공작 인터르스키 1세는 400여 년의 분열기를 끝내고 평원을 통일한 뒤, 3세기 로마의 침략으로 무너진 고대 사랜드 제국의 계승을 내세워 차르를 칭했다. 제정 초기의 차르들은 옛 제국의 동방 영역을 되찾으려 동쪽으로 원정해 8세기 중엽까지 동부 저지대의 제방 연합들로부터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나, 789년 사무탁호를 둘러싼 빌베른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약 300년 동안 이 늪지대를 두고 국경 분쟁을 되풀이했다. 분쟁은 1089년 사무탁 협정으로 늪지 대부분을 빌베른에 넘겨주며 끝났다.
13세기 중엽 몽골의 침입은 제정을 뿌리째 흔들었다. 1259년 수도 인크론슈타트가 함락되어 마지막 차르 블라디슬라프 4세가 전사하면서 인크론슈타트 왕조가 끊겼고, 서부 평원은 32년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원은 비어 버린 동부에 고려인·화북 한인·열도인·대월인을 강제로 옮겨 훗날 북산과 동사랜드의 모체를 만들었다. 1291년 서부 변경의 영주 스테판 즐라토미르가 인크론슈타트를 되찾아 즐라토미로비치 왕조를 열었지만, 1321년 몬타나 화산 대분화와 1349년 흑사병이 겹치며 동부 저지대는 제정의 손을 완전히 떠났다. 1418년 그 자리에 대월계 주민의 남꽝 왕국이 들어섰다.
1597년 즐라토미로비치 왕조가 후사 없이 끊기자 14년의 혼란기가 이어졌고, 1611년 귀족들의 사보르가 추대한 보그단 1세가 스베토자레비치 왕조를 열었다. 보그단 1세의 남꽝 원정이 1624년 청평의 원군에 막혀 1627년 롱 강을 경계로 강화하자, 제정은 안으로 눈을 돌려 1652년 대법전으로 농노제를 법으로 굳히고 1661년 서부 해안의 신도시 인터그라드로 천도했다. 1762년 궁정 정변으로 즉위한 여제 옐레나 1세는 벨로슬라비치 왕조를 열고 1784년 북부 고원을 병합해 제정의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
19세기의 제정은 낭만주의 문화의 황금기와 농노제의 정체가 공존한 시대였다. 1854~1856년 서부 전쟁에서 라 마베라에 패하자 페타르 3세는 국영 병기창과 철도를 중심으로 한 위로부터의 산업화에 나섰지만, 1867년 농노 해방 칙령안은 대귀족들의 반대로 통치평의회에서 부결되었다. 제정은 농노제와 전제정을 그대로 안은 채 20세기를 맞았고, 1907년 라자르 2세가 공포한 《국가기본법》도 형식적 입헌에 그쳤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에 러시아 제국과 함께 협상국 편으로 참전해 서부 전선에서 라 마베라와 소모전을 벌이다, 1917년 3월 장미 혁명으로 1,206년 만에 무너졌다.
4. 자연환경 [편집]
4.1. 지형 [편집]
제정 사랜드는 남랜드 동남부의 넓은 평원과 그 북쪽의 고원, 동남쪽의 산지를 아우르는 나라였다. 1914년 기준 국토 면적은 약 301만 km²로, 이 가운데 약 74만 km²가 1784년 병합한 북부 고원이었다. 제정의 지형은 크게 다섯 지역으로 나뉜다.
- 사랜드 평원: 국토의 중심이자 제정의 심장. 북쪽 고원의 가장자리에서 남쪽 바다까지 완만하게 기울어진 대평원으로, 평균 해발고도는 100~300m에 불과하다. 고대 사랜드 제국 이래 수리 농경의 무대였으며, 평원 곳곳에 고대 운하와 둑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랜드(아랫땅)'라는 이름도 고원에서 내려다본 이 평원을 가리킨 말이었다.
- 북부 고원: 평원 북쪽에 해발 1,500~2,500m로 솟은 고원 분지. 고원 가장자리는 평원 쪽으로 깎아지른 단애를 이루며, 고대부터 평원과 고원의 경계이자 분쟁의 선이었다. 고원 분지 안쪽은 건조한 초지와 오아시스형 농경지로 이루어져 있다.
- 카스탄 산지: 평원 동남쪽에 솟은 습윤한 산악 지대. 최고봉은 해발 3,800m가 넘으며, 깊은 협곡이 많아 평원 쪽에서 통제하기 어려웠다. 옛 사랜드어를 지킨 카스탄족의 터전이다.
- 동부 저지대: 평원 동쪽 끝에서 롱 강까지 이어지는 몬순형 저습지. 1627년 강화 이후 롱 강 서안만이 제정의 영토로 남았다.
- 남부 해안: 평원이 바다와 만나는 해안선으로, 스베틀라 강 하구의 곡물 항구 자톤과 서부 해안의 수도 인터그라드가 자리잡았다.
4.2. 하천과 호수 [편집]
평원의 생명선은 고원에서 발원해 남쪽 바다로 흘러드는 스베틀라 강이었다. 길이 약 2,400km로 평원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중류에 공업 도시 크라슬리스크가, 하구에 항구 도시 자톤이 있다. 서부에는 옛 수도 인크론슈타트를 지나 인터그라드 앞바다로 흘러드는 베레스 강이, 서쪽 국경에는 라 마베라와의 경계를 이루는 벨라 강이 흐른다. 동쪽 국경의 롱 강은 몬순기마다 범람해 물길이 바뀌는 강으로, 1627년 강화 이후 남꽝 왕국과의 경계가 되었다.
동부 저지대의 사무탁호는 매년 몬순이 올 때마다 지형이 바뀌는 늪지 호수로, 제정 초기 빌베른과의 300년 국경 분쟁의 무대였다. 평원 곳곳에는 고대 제국 시대의 저수지와 운하가 남아 있었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는 분열기에 무너져 습지가 되었다가 제정 시대에 영주들이 다시 쌓았다.
동부 저지대의 사무탁호는 매년 몬순이 올 때마다 지형이 바뀌는 늪지 호수로, 제정 초기 빌베른과의 300년 국경 분쟁의 무대였다. 평원 곳곳에는 고대 제국 시대의 저수지와 운하가 남아 있었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는 분열기에 무너져 습지가 되었다가 제정 시대에 영주들이 다시 쌓았다.
4.3. 기후 [편집]
사랜드 평원의 서부와 중부는 반건조 대륙성 기후다.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춥고 바람이 거세다. 연 강수량은 300~500mm 안팎으로, 비에만 기대서는 곡물 농사가 불안정하다. 이 때문에 평원에서는 고대부터 강물을 끌어들이는 관개가 농업의 전제였고, 물길을 쥔 자가 땅을 쥐었다. 분열기의 '분수(分水)'가 정치의 무기가 되고 제정의 국장 그리핀이 수문 열쇠를 쥐고 있는 것도 이런 기후에서 비롯되었다.
동부 저지대는 여름 몬순의 영향을 받아 6~9월에 연 강수량의 대부분이 쏟아지는 습윤 기후로, 쌀 농사가 이루어진다. 남부 해안은 바다의 영향으로 겨울이 온화하며, 북부 고원은 한랭 건조하고 일교차가 크다. 카스탄 산지는 제정에서 가장 비가 많은 곳으로, 겨울에는 많은 눈이 내려 고갯길이 몇 달씩 막혔다.
동부 저지대는 여름 몬순의 영향을 받아 6~9월에 연 강수량의 대부분이 쏟아지는 습윤 기후로, 쌀 농사가 이루어진다. 남부 해안은 바다의 영향으로 겨울이 온화하며, 북부 고원은 한랭 건조하고 일교차가 크다. 카스탄 산지는 제정에서 가장 비가 많은 곳으로, 겨울에는 많은 눈이 내려 고갯길이 몇 달씩 막혔다.
4.4. 자원 [편집]
평원의 관개 농지와 초지가 제정의 가장 큰 자원이었다. 지하자원은 북부 고원과 카스탄 산지에 몰려 있었는데, 고원 가장자리의 철광과 구리, 카스탄 산지 북사면의 석탄이 대표적이다. 1784년 고원 병합과 19세기 후반 카스탄 산지 탄광 개발은 모두 이 자원을 노린 것이었다. 서부의 삼림은 조선용 목재를, 남부 해안의 염전은 소금을 공급했다.
5. 인문환경 [편집]
5.1. 인구 [편집]
제정 사랜드는 1902년 처음이자 유일한 전국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그 전까지는 세금과 징병을 위한 영지별 호구 조사만 있었는데, 농노의 수를 줄여 신고하려는 영주들 때문에 정확성이 떨어졌다. 1891년 평원의 흉년 뒤 정확한 통계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라자르 2세는 1901년 인구조사를 명했다. 교사·사제·하급 관리 등 9만여 명의 조사원이 1902년 1월부터 석 달 동안 모든 가구를 방문했고, 결과를 정리하는 데 6년이 걸렸다.
1902년 인구조사에 따른 제정의 인구는 1억 2,940만 명이었다. 이후 인구는 꾸준히 늘어 1913년에는 약 1억 5,26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인구의 86%가 농촌에 살았고, 전체 인구의 절반 남짓이 농노였다.
1902년 인구조사에 따른 제정의 인구는 1억 2,940만 명이었다. 이후 인구는 꾸준히 늘어 1913년에는 약 1억 5,26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인구의 86%가 농촌에 살았고, 전체 인구의 절반 남짓이 농노였다.
5.2. 민족 [편집]
민족 | 인구 | 비율 |
사랜드인 | 6,420만 | 49.6% |
고원인 | 2,490만 | 19.2% |
1,510만 | 11.7% | |
940만 | 7.3% | |
대월계 동부민 | 610만 | 4.7% |
외국계 | 90만 | 0.7% |
기타 | 880만 | 6.8% |
계 | 1억 2,940만 | 100% |
1902년 인구조사는 모국어를 기준으로 민족을 나누었다.
사랜드인은 6~7세기 평원에 정착한 남슬라브계 이주민과 옛 사랜드인이 섞여 형성된 다수 민족으로, 제정의 지배층과 농노 대부분이 여기에 속했다. 고원인은 1784년 병합된 북부 고원의 주민으로 대부분 무슬림이었다. 카스탄인은 동남부 산지에서 옛 사랜드어를 지켜 온 민족으로, 제정의 낭만주의자들은 이들을 '살아 있는 고대'라 불렀다. 타르타르인은 14세기 몽골 침입 뒤 동부에 남은 집단의 후손이며, 대월계 동부민은 원나라가 강제로 옮긴 대월인의 후손 가운데 1627년 이후 롱 강 서안에 남은 이들이다. 외국계는 루이나·빌베른계 상인과 기술자가 대부분이었다.
5.3. 언어 [편집]
공용어는 남슬라브계 언어인 사랜드어였다. 키릴 문자로 표기했으며, 1818년 언어학자 사바 크르스티치의 《사랜드어 문법》으로 문어가 표준화되었다. 제정 시기의 철자는 단어 끝의 ъ와 모음 ѣ 등을 유지했는데, 이는 1919년 임시정부의 철자 개정으로 폐지되었다. 궁정과 귀족 사이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프랑스어가 교양어로 쓰였다.
그 밖에 고원인의 고랜드어, 카스탄인의 카스탄어(옛 사랜드어의 후손), 타르타르어, 동부의 대월계 언어가 쓰였다. 러시아어는 혁명가들과 일부 지식인의 언어였을 뿐 제정 시기에는 공식적인 지위가 없었으며, 1949년 사비에트 수립과 함께 공용어가 되었다.
그 밖에 고원인의 고랜드어, 카스탄인의 카스탄어(옛 사랜드어의 후손), 타르타르어, 동부의 대월계 언어가 쓰였다. 러시아어는 혁명가들과 일부 지식인의 언어였을 뿐 제정 시기에는 공식적인 지위가 없었으며, 1949년 사비에트 수립과 함께 공용어가 되었다.
5.4. 종교 [편집]
종교 | 비율 |
61.8% | |
이슬람 | 24.6% |
불교 | 5.9% |
가톨릭 |
|
기타 | 6.6% |
1902년 인구조사 기준.
국교는 사랜드 정교회였다. 사랜드인과 카스탄인 대부분이 정교회 신자였는데, 카스탄인은 카스탄어로 전례를 드리는 고유의 전례 전통을 지켜 '카스탄 전례'로 따로 불렸다. 차르는 정교 신앙의 수호자로서 성무원을 통해 교회를 통제했고, 정교회 이외의 종교를 믿는 사람은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이슬람은 고원인과 타르타르인 다수의 종교였다. 1784년 고원 병합 조약은 고원인의 이슬람 신앙과 이슬람 법정을 인정했는데, 제정은 이 약속을 대체로 지켰으나 고원에 정교회 선교회를 세우는 것은 막지 않았다. 불교는 타르타르인 일부와 대월계 동부민의 종교였고, 가톨릭은 외국계 상인과 서부 국경 지대 일부의 종교였다.
5.5. 도시 [편집]
도시 | 인구(1914) | 비고 |
214만 | 수도 | |
132만 | 공업 중심지 | |
64만 | 옛 수도 | |
자톤 | 51만 | 곡물 항구 |
43만 | 고원 총독부 | |
베레스니크 | 28만 | 곡물 집산지 |
타라크 | 16만 | 카스탄 총독부 |
인터그라드는 1661년 서부 해안에 건설된 계획도시로, 건국자 인터르스키 1세의 이름을 땄다. 궁전과 관청, 귀족 저택이 늘어선 도심과 방직공장·철도 공작창이 들어선 외곽 노동자 지구로 뚜렷이 나뉘었다. 크라슬리스크는 스베틀라 강 중류의 곡물 시장 도시였다가 1859년 국영 병기창이 세워지며 제정 최대의 공업 도시가 되었다. 인크론슈타트는 건국 이래 950년 동안 수도였던 곳으로, 천도 뒤에도 차르의 대관식은 계속 이곳의 성모안식 대성당에서 열렸다.
5.6. 행정 구역 [편집]
1914년 기준 제정은 61개의 현(縣)으로 나뉘었다. 현에는 차르가 임명하는 현지사를 두었고, 현 아래에는 군(郡)이 있었다. 변경과 이민족 지역에는 여러 현을 묶은 총독부를 두어 총독이 군사권까지 쥐고 다스렸는데, 고원 총독부(아바나), 카스탄 총독부(타라크), 동부 변경 총독부가 그것이다. 수도 인터그라드와 옛 수도 인크론슈타트는 현에 속하지 않는 직할시였다.
그러나 실제 농촌 통치의 상당 부분은 국가가 아니라 영주가 맡았다. 영지 안의 농노에 대한 재판·경찰·징세는 1918년 농노제가 폐지될 때까지 영주의 권한이었고, 현지사의 행정은 영지의 문 앞에서 멈추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실제 농촌 통치의 상당 부분은 국가가 아니라 영주가 맡았다. 영지 안의 농노에 대한 재판·경찰·징세는 1918년 농노제가 폐지될 때까지 영주의 권한이었고, 현지사의 행정은 영지의 문 앞에서 멈추는 일이 많았다.
6. 정치 [편집]
제정 사랜드는 건국부터 1907년까지 차르 1인이 입법·행정·사법의 최종 권한을 쥔 전제군주국이었다. 1907년 《국가기본법》으로 의회가 열리면서 형식상 준입헌군주국이 되었지만, 차르는 의회를 언제든 해산할 수 있었고 실제로 10년 동안 세 번 해산했다.
다만 1,206년 동안 차르의 권력이 늘 같았던 것은 아니다. 차르의 권력은 대귀족 '벨리카시'와의 줄다리기 속에서 오르내렸다. 인크론슈타트 왕조와 즐라토미로비치 왕조의 차르들은 대귀족들의 회의인 사보르의 동의 없이는 전쟁도 세금도 결정하기 어려웠고, 혼란기에는 사보르가 차르를 추대하기까지 했다. 전제정이 완성된 것은 스베토자레비치 왕조가 1652년 대법전으로 농노제를 굳혀 귀족의 지지를 사고, 그 대가로 사보르를 더 이상 소집하지 않으면서부터였다. 귀족은 영지 안에서의 절대적 지배를 얻었고, 차르는 영지 밖의 모든 것을 얻었다. 이 거래가 제정 후기 정치의 뼈대였다.
다만 1,206년 동안 차르의 권력이 늘 같았던 것은 아니다. 차르의 권력은 대귀족 '벨리카시'와의 줄다리기 속에서 오르내렸다. 인크론슈타트 왕조와 즐라토미로비치 왕조의 차르들은 대귀족들의 회의인 사보르의 동의 없이는 전쟁도 세금도 결정하기 어려웠고, 혼란기에는 사보르가 차르를 추대하기까지 했다. 전제정이 완성된 것은 스베토자레비치 왕조가 1652년 대법전으로 농노제를 굳혀 귀족의 지지를 사고, 그 대가로 사보르를 더 이상 소집하지 않으면서부터였다. 귀족은 영지 안에서의 절대적 지배를 얻었고, 차르는 영지 밖의 모든 것을 얻었다. 이 거래가 제정 후기 정치의 뼈대였다.
6.1. 차르 [편집]
상세 내용은 전사랜드의 차르이자 전제자 문서 참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름), 전사랜드의 차르이자 전제자, 인크론슈타트와 인터그라드의 차르, 평원과 물길의 주인, 고원의 군주, 카스탄 산지의 보호자, 롱 강 서안과 남부 해안의 영주, 사무탁의 상속자, 그리고 기타 여러 땅의 군주.1784년 이후 차르의 공식 칭호
국가원수는 차르(Цар)였다. 공식 칭호는 '전사랜드의 차르이자 전제자'로, 인터르스키 1세가 고대 사랜드 제국의 계승을 내세워 처음 칭했다. 칭호의 '사무탁의 상속자'는 1089년 빌베른에 넘겨준 사무탁호 일대에 대한 권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차르는 법률의 제정과 폐지, 관리의 임면, 전쟁과 강화, 조약 체결, 사면, 화폐 발행의 권한을 모두 가졌다. 정교 신앙의 수호자로서 사랜드 정교회 총대주교를 임명했으며, 정교회 신자만이 차르가 될 수 있었다. 차르의 대관식은 1661년 천도 뒤에도 옛 수도 인크론슈타트의 성모안식 대성당에서 열렸는데, 새 차르가 대성당 앞 고대 수로의 수문을 손수 여는 '수문 의식'이 대관식의 핵심이었다. 평원의 물길을 다스리는 자가 곧 평원의 주인이라는 관념을 의례로 만든 것이다.
6.2. 중앙 기구 [편집]
6.2.1. 통치평의회 [편집]
Владајући савет. 1763년 옐레나 1세가 설치한 최고 행정·사법 기구로, 차르가 임명하는 20~40명의 평의원으로 구성되었다. 법률안을 심의해 차르에게 올리고, 관리의 비위를 감찰하며, 중앙과 지방 사이의 분쟁을 재판하는 최고 법원 역할을 겸했다. 평의원 대부분이 대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통치평의회는 차르의 손발이면서 동시에 귀족 이익의 마지막 방파제였다. 1867년 페타르 3세의 농노 해방 칙령안을 부결시킨 곳도 통치평의회였다. 1907년 이후에는 사보르 상원의 절반을 차지하는 기구로 개편되었다.
6.2.2. 사보르 [편집]
Сабор. 본래는 중세 제정에서 대귀족과 고위 성직자가 모여 전쟁·세금·제위 계승을 논의하던 신분 회의였다. 즐라토미로비치 왕조 때 정기적으로 소집되어 차르의 권력을 견제했고, 1611년에는 혼란기를 끝내며 보그단 1세를 차르로 추대했다. 그러나 1652년 대법전을 승인한 회의를 마지막으로 255년 동안 소집되지 않았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인터그라드 총파업과 평원의 농민 봉기가 번지자, 라자르 2세는 1907년 《국가기본법》을 공포해 사보르를 양원제 의회로 되살렸다. 상원은 통치평의회 평의원과 차르가 임명하는 의원 절반, 귀족 회의·정교회·상공회의소가 뽑는 의원 절반으로 이루어졌다. 하원인 민회(Народно веће)는 지주·도시민·국가 농노 마을의 세 선거인단이 간접선거로 뽑았는데,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영주 농노에게는 선거권이 없었다.
사보르는 1907년, 1910년, 1913년 세 차례 소집되었고 매번 차르의 해산으로 끝났다. 1913년 하원이 농노 해방 법안을 상정하자 라자르 2세는 개원 4개월 만에 하원을 해산하고 다음 선거를 무기한 미루었다. 사보르는 1917년 장미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지면서 사라졌고, 공화국은 이 이름을 버리고 새 의회를 국민의회와 원로원으로 불렀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인터그라드 총파업과 평원의 농민 봉기가 번지자, 라자르 2세는 1907년 《국가기본법》을 공포해 사보르를 양원제 의회로 되살렸다. 상원은 통치평의회 평의원과 차르가 임명하는 의원 절반, 귀족 회의·정교회·상공회의소가 뽑는 의원 절반으로 이루어졌다. 하원인 민회(Народно веће)는 지주·도시민·국가 농노 마을의 세 선거인단이 간접선거로 뽑았는데,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영주 농노에게는 선거권이 없었다.
사보르는 1907년, 1910년, 1913년 세 차례 소집되었고 매번 차르의 해산으로 끝났다. 1913년 하원이 농노 해방 법안을 상정하자 라자르 2세는 개원 4개월 만에 하원을 해산하고 다음 선거를 무기한 미루었다. 사보르는 1917년 장미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지면서 사라졌고, 공화국은 이 이름을 버리고 새 의회를 국민의회와 원로원으로 불렀다.
6.2.3. 대신회의 [편집]
각 부처의 대신은 본래 차르에게만 책임을 졌고, 대신들이 함께 모이는 회의는 차르가 필요할 때 여는 자문 모임에 불과했다. 1907년 《국가기본법》은 대신회의를 상설 기구로 만들고 차르가 임명하는 총리가 이를 주재하게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여전히 사보르가 아니라 차르에게만 책임을 졌다. 1907년부터 1917년까지 세 명의 총리가 있었다.
총리 | 재임 |
밀로라드 J. 데스포토비치 | 1907~1911 |
스타노예 B. 마르코비치 | 1911~1916 |
페타르 L. 요바노비치 | 1916~1917 |
1914년 기준 대신회의는 내무·외무·재무·법무·전쟁·해군·교통·교육·궁내·농지·상공의 11개 부처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은 경찰과 현지사를 거느린 내무부와, 국영 병기창과 철도를 관할한 전쟁부였다.
6.2.4. 성무원 [편집]
Свети синод. 사랜드 정교회의 최고 의결 기관으로, 총대주교와 대주교 여섯 명, 차르가 임명하는 세속 감독관 한 명으로 이루어졌다. 1652년 대법전이 교회 재산과 성직자 임명을 차르의 감독 아래 둔 뒤 성무원은 사실상 국가 기관이 되었고, 세속 감독관은 '차르의 눈'이라 불렸다. 러시아와 달리 사랜드는 총대주교직을 폐지하지 않았지만, 총대주교는 차르의 임명을 받아야 했고 성무원의 결정은 차르의 재가를 얻어야 효력이 있었다.
6.3. 관료제 [편집]
1724년 니콜라 1세의 관등령은 모든 관직을 문관·무관·궁정관의 12개 관등으로 정리했다. 일정 관등 이상에 오른 사람에게는 귀족 신분을 주었는데, 문관은 5등관, 무관은 7등관 이상이 세습 귀족이 되었다. 관등령은 평민 출신 관료가 귀족이 되는 통로였지만, 농노는 관직에 오를 수 없었으므로 이 통로는 처음부터 인구의 대다수에게 닫혀 있었다.
관등 | 문관 | 무관 |
1등 | 대재상 | 원수 |
2등 | 실질추밀관 | 대장 |
3등 | 추밀관 | 중장 |
4등 | 국무참사관 | 소장 |
5등 | 참사관 | 대령 |
6등 | 궁정참사관 | 중령 |
7등 | 합의관 | 소령 |
8~12등 | 서기관·기록관 등 | 대위~소위 |
6.4. 지방 통치 [편집]
현에는 차르가 임명하는 현지사가, 총독부에는 총독이 있었다. 그러나 제정의 지방 통치는 국가·영주·공동체가 겹겹이 나누어 가진 구조였다. 영지 안의 농노는 영주의 재판과 징세를 받았고, 국가 농노의 마을은 국가가 임명한 관리인이 다스렸다. 마을 단위의 일상은 확대가족 공동체인 '자드루가'와 수문을 함께 관리하는 '수문 공동체'가 꾸려 나갔다.
변경은 따로 다스렸다. 고원 총독부에서는 1784년 병합 조약에 따라 이슬람 법정과 부족 원로 회의가 유지되었고, 카스탄 총독부의 산지 마을들은 농노제를 겪지 않은 대신 씨족 회의를 통해 병역 의무를 졌다. 도시에는 상인과 장인의 길드가 뽑는 시 참사회가 있었는데, 인터그라드와 크라슬리스크의 시 참사회는 19세기 후반 자유주의자들의 거의 유일한 합법 무대였다.
변경은 따로 다스렸다. 고원 총독부에서는 1784년 병합 조약에 따라 이슬람 법정과 부족 원로 회의가 유지되었고, 카스탄 총독부의 산지 마을들은 농노제를 겪지 않은 대신 씨족 회의를 통해 병역 의무를 졌다. 도시에는 상인과 장인의 길드가 뽑는 시 참사회가 있었는데, 인터그라드와 크라슬리스크의 시 참사회는 19세기 후반 자유주의자들의 거의 유일한 합법 무대였다.
6.5. 정당 [편집]
정당은 1907년 《국가기본법》이 결사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인정한 뒤에야 합법화되었다. 사보르에서는 대귀족과 지주가 중심이 된 보수파 '차르와 땅 연합', 도시 상공업자와 지식인의 자유주의 정당 '헌정당', 국가 농노 마을 출신 의원들의 '농민 동맹'이 주요 세력이었다. 사회주의 정당은 끝까지 불법이었고, 사랜드 사회당은 1917년 장미 혁명 뒤에야 합법화되었다.
7. 외교 [편집]
7.1. 빌베른 [편집]
빌베른은 제정의 첫 숙적이었다. 제정 초기의 동방 원정은 동부 저지대에서 빌베른 공화국과 부딪혔고, 789년 사무탁호 전쟁의 패배 뒤 약 300년 동안 늪지대를 두고 국경 분쟁이 이어졌다. 사무탁호는 매년 몬순마다 지형이 바뀌는 늪지라 국경선을 그어도 이듬해면 의미가 없어졌고, 이는 분쟁이 끝나지 않은 가장 큰 이유였다. 1089년 사무탁 협정으로 늪지 대부분이 빌베른령이 되면서 분쟁은 끝났지만, 차르의 칭호에는 '사무탁의 상속자'가 끝까지 남았다.
13세기 빌베른이 랜드 최대의 강국으로 떠오르는 동안 제정은 몽골 침입으로 무너졌고, 이후 두 나라는 직접 국경을 맞대지 않게 되면서 교역 상대로 관계가 바뀌었다. 19세기 후반 빌베른 공화정이 전복되고 콘스탄티노폴에 외국 조차지가 난립했을 때, 제정은 그 틈에 1881년 콘스탄티노폴 조계를 얻었다.
13세기 빌베른이 랜드 최대의 강국으로 떠오르는 동안 제정은 몽골 침입으로 무너졌고, 이후 두 나라는 직접 국경을 맞대지 않게 되면서 교역 상대로 관계가 바뀌었다. 19세기 후반 빌베른 공화정이 전복되고 콘스탄티노폴에 외국 조차지가 난립했을 때, 제정은 그 틈에 1881년 콘스탄티노폴 조계를 얻었다.
7.2. 몽골과 원 [편집]
7.3. 청평과 남꽝 왕국 [편집]
청평은 고대 사랜드 제국이 기원전 2세기 정복해 다스린 땅이었고, 제정의 차르들은 이 기억을 근거로 동방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동부를 둘러싼 경쟁 상대는 1418년 동부 저지대에 들어선 대월계 남꽝 왕국이었다. 남꽝은 1420년 청평의 책봉을 받았고, 1620년대 보그단 1세가 남꽝을 침공하자 청평이 1624년 원군을 보내 이를 막았다. 1627년 강화로 롱 강이 국경이 되었고, 이 선은 오늘날 사비에트와 동사랜드의 국경으로 남았다.
19세기 중엽 청평이 열강의 압력에 흔들리자 제정은 청평 남부로 진출했다. 1862년 해군 원정으로 남부의 항구 푹하이를 99년 기한으로 조차했으며, 이를 발판으로 청평 남부의 교역과 철도 이권에 영향력을 넓혔다. 다만 남꽝 왕국을 보호국으로 삼으려던 시도는 청평의 반발로 끝내 이루지 못했다.
19세기 중엽 청평이 열강의 압력에 흔들리자 제정은 청평 남부로 진출했다. 1862년 해군 원정으로 남부의 항구 푹하이를 99년 기한으로 조차했으며, 이를 발판으로 청평 남부의 교역과 철도 이권에 영향력을 넓혔다. 다만 남꽝 왕국을 보호국으로 삼으려던 시도는 청평의 반발로 끝내 이루지 못했다.
7.4. 고랜드 [편집]
북부 고원의 고랜드와는 고대부터 고원 가장자리를 두고 국경 분쟁이 이어졌다. 고원 사람들은 평원으로 내려와 약탈과 교역을 되풀이했고, 평원의 차르들은 고원 가장자리에 요새선을 쌓아 이를 막았다. 18세기 들어 고원의 철광과 구리를 노린 제정은 공세로 돌아섰고, 1781년부터 1784년까지의 고원 전쟁 끝에 옐레나 1세의 군대가 아바나 요새를 함락하면서 고원 전체를 병합했다. 병합 조약은 고원인의 이슬람 신앙과 법정, 부족 원로 회의를 인정했으며, 고원은 제정 말기까지 총독이 다스리는 직할 영토로 남았다. 고원은 1917년 이후 공화국과 사비에트로 승계되었다가 1952년 고랜드로 명목상 독립했다.
7.5. 라 마베라 [편집]
서쪽 이웃 라 마베라와는 벨라 강을 경계로 오래 긴장 관계였다. 1854년부터 1856년까지의 서부 전쟁에서 제정은 라 마베라에 패해 벨라 강 서안의 일부를 넘겨주었고, 이 패배는 페타르 3세의 군사·산업 개혁의 계기가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라 마베라가 동맹국 편에 서자 제정은 서부 전쟁의 잃은 땅을 되찾겠다며 서부 전선을 열었으나, 4년의 소모전은 오히려 제정을 무너뜨렸다.
7.6. 루이나 [편집]
루이나와는 직접 국경을 맞대지 않았고, 19세기 내내 우호적인 교역 상대였다. 루이나는 제정의 곡물을 사들였고, 제정은 루이나의 기계와 자본을 들여왔다. 1870년대부터 제정은 루이나 은행단에게서 여러 차례 차관을 들여와 국영 병기창과 철도를 지었으며, 1914년 기준 루이나는 제정의 최대 채권국이었다. 차르 정부는 1885년 왕정을 끝내고 공화국이 된 루이나의 체제를 경계했지만, 루이나 자본이 없으면 산업화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관계는 끝까지 우호적으로 유지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두 나라는 같은 협상국 편에 섰다.
7.7. 러시아 제국 [편집]
러시아 제국은 같은 정교회 국가로서 제정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었다. 두 나라 황실은 18세기 후반부터 여러 차례 혼인을 맺었고, 1914년 제정은 러시아와 함께 협상국 편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사랜드 혁명가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이오시프 노스탈린을 비롯한 많은 사랜드 혁명가들이 러시아 혁명 운동 속에서 자랐고, 1917년 3월 두 제국은 같은 달에 무너졌다.
7.8. 해외 이권 [편집]
제정은 두 곳에 해외 이권을 가졌다. 1862년 조차한 청평 남부의 푹하이 조차지는 해군 기지이자 청평 남부 교역의 거점이었고, 1881년 얻은 콘스탄티노폴 조계는 랜드해협 서부의 교역 거점이었다. 두 곳 모두 1919년 임시정부가 반환했다.
8. 경제 [편집]
상세 내용은 제정 사랜드/경제 문서 참고.
제정 사랜드의 경제는 끝까지 농노제에 기반한 농업 경제였다. 1902년 인구의 86%가 농촌에 살았고, 전체 인구의 절반 남짓이 영주나 국가에 묶인 농노였다. 평원의 농업은 강물을 끌어들이는 관개에 기대었는데, 관개 수로와 수문은 대부분 영주의 소유였다. 영주는 땅뿐 아니라 물을 쥐고 있었으므로, 농노가 영지를 떠나는 것은 물을 떠나는 것이었다. 농노는 영주의 직영지에서 일주일에 사나흘 부역하거나, 영주의 허가를 받아 도시에 일하러 나가는 대신 해마다 공납을 바쳤다.
제정의 산업화는 아래에서가 아니라 위에서 시작되었다. 1854~1856년 서부 전쟁의 패배로 군의 낙후가 드러나자, 페타르 3세는 1859년 국영 병기창 칙령을 내려 크라슬리스크에 국영 병기창을 세우고 국가 주도로 철도를 깔기 시작했다. 공장의 노동력은 국가 농노를 공장에 묶어 두는 '배속 농노'와, 영주에게 공납을 내고 도시로 나온 '출가 농노'로 채웠다. 자본은 곡물 수출 대금과 1870년대부터 들여온 루이나 차관이었다. 1914년까지 제정은 약 2만 2천 km의 철도와 크라슬리스크·인터그라드의 병기·제철·방직 공업 지대를 갖추었지만, 공업은 군수와 철도에 치우쳐 있었고 농촌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통화는 디나르였고, 1897년 금본위제를 도입했다. 주요 수출품은 곡물·면화·소금·구리였으며, 주요 수입품은 기계·철도 차량·무기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철도가 군수 수송에 매달리고 1916년 흉작이 겹치면서 도시의 식량 공급이 무너졌고, 이것이 1917년 장미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9. 사회 [편집]
9.1. 신분제 [편집]
제정 사랜드의 신민은 법적으로 귀족·성직자·도시민·농노의 네 신분과, 이 틀 밖에 놓인 산지 자유민과 변경민으로 나뉘었다. 신분은 세습되었고, 신분마다 세금·병역·재판의 의무와 권리가 달랐다.
신분 | 비율(1902) |
귀족 | 0.8% |
성직자 | 0.5% |
도시민 | 9.4% |
농노 | 52.3% |
산지 자유민 | 5.8% |
변경민 | 31.2% |
9.1.1. 귀족 [편집]
귀족은 대귀족 '벨리카시'(великаши)와 소귀족 '플레미치'(племићи)로 나뉘었다. 벨리카시는 수천에서 수만 명의 농노와 넓은 관개 영지를 가진 수십 개의 가문으로, 통치평의회와 궁정의 요직을 독차지했다. 플레미치는 관등령에 따라 관직이나 군 복무로 귀족이 된 가문이 대부분이었고, 농노를 거느리지 못한 가난한 귀족도 많았다. 귀족은 인두세와 체형을 면제받았으며, 영지 안의 농노에 대한 재판·경찰·징세권을 가졌다.
9.1.2. 성직자 [편집]
정교회 성직자는 세금과 병역을 면제받는 독자 신분이었다. 결혼할 수 있는 교구 사제는 대개 세습되어 사제의 아들이 사제가 되었고, 결혼하지 않는 수도 성직자만이 주교 이상으로 오를 수 있었다. 농노의 아들이 영지를 합법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 신학교를 거쳐 성직자 신분을 얻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학교는 제정 말기 급진 사상이 가장 활발하게 퍼진 곳이 되었다.
9.1.3. 도시민 [편집]
도시민은 길드에 속한 상인, 장인, 그리고 도시 평민으로 나뉘었다. 상인은 재산에 따라 세 등급의 길드에 소속되었고, 1등 길드 상인만이 해외 무역을 할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의사·기술자·교사 같은 전문직과 하급 관료가 늘어나 도시민 사이에 작은 중간층이 생겼는데, 이들이 1907년 헌정당과 1917년 장미 혁명의 공화파를 이루었다.
9.1.4. 농노 [편집]
농노는 인구의 절반 남짓을 차지한 최하층 신분으로, 법적으로 영주나 국가의 재산이었다. 농노는 세 종류로 나뉘었다.
- 영주 농노: 귀족 영지에 묶인 농노. 영주는 농노를 사고팔거나 다른 영지로 옮길 수 있었고, 농노는 영주의 허가 없이 결혼하거나 영지를 떠날 수 없었다.
- 국가 농노: 국유지와 차르 직영지에 묶인 농노. 영주 농노보다 처지가 나아 마을 자치와 소규모 재산 소유가 허용되었으며, 1907년 이후에는 하원 선거권도 가졌다.
- 배속 농노: 1859년 이후 국영 병기창·광산·철도에 배속된 국가 농노. 공장을 떠날 수 없었고, 임금 대신 숙소와 배급을 받았다. 제정 산업화의 숨은 기둥이었다.
농노제는 1652년 대법전으로 법제화된 뒤 266년 동안 이어지다가, 1918년 임시정부의 포고로 폐지되었다. 1867년 페타르 3세의 해방 칙령안이 부결된 뒤로도 크고 작은 해방 논의가 있었지만 모두 귀족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사랜드의 농노제가 러시아보다 반세기 넘게 오래 살아남은 것은 땅과 함께 물을 쥔 영주의 힘 때문이었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9.1.5. 산지 자유민 [편집]
카스탄 산지의 주민들은 험한 지형 덕에 농노제를 끝내 겪지 않았다. 제정은 이들을 '산지 자유민'으로 분류해 농노제와 인두세를 면제하는 대신, 씨족 단위로 기병을 내어 국경을 지키게 했다. 카스탄 산지 기병대는 제정 군대의 정예로 꼽혔지만, 산지 자유민의 자치와 언어는 제정 말기 사랜드화 정책 속에서 점점 좁아졌다.
9.1.6. 변경민 [편집]
고원인·타르타르인·대월계 동부민처럼 정교회 사랜드인이 아닌 변경의 주민들은 '변경민'으로 따로 분류되었다. 이들은 고유의 법과 종교를 인정받고 병역을 면제받는 대신 별도의 공납을 냈다. 변경민은 관직에 오를 수 없었고, 정교회로 개종해야 사랜드인과 같은 신분 체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9.2. 자드루가 [편집]
평원 농촌의 기본 단위는 '자드루가'(задруга)라 불린 확대가족 공동체였다. 형제와 그 가족, 때로는 사촌까지 수십 명이 한 지붕 아래 살며 땅과 가축, 농기구를 함께 소유했고, 가장 나이 많은 남자가 공동체를 이끌었다. 영주는 자드루가를 단위로 부역과 공납을 매겼으므로, 자드루가는 농노의 피난처이면서 동시에 영주의 징수 장치였다. 여러 자드루가가 하나의 수문과 수로를 함께 관리하는 '수문 공동체'를 이루었고, 물을 나누는 순서를 정하는 수문 공동체 회의는 농노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리였다.
9.3. 교육 [편집]
제정의 문해율은 매우 낮았다. 1902년 인구조사에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인구의 19%에 그쳤고, 영주 농노 가운데서는 6%에 불과했다. 초등교육은 대부분 교회 부속 학교가 맡았으며, 영주들은 농노의 교육이 도망과 반란을 부른다고 보아 영지 안에 학교를 세우는 것을 꺼렸다.
고등교육 기관으로는 1756년 세워진 인터그라드 제국대학, 정교회의 인터그라드·인크론슈타트 신학교, 1861년 국영 병기창과 함께 세워진 크라슬리스크 공과학교가 있었다. 대학 교육은 귀족과 부유한 도시민의 몫이었으나, 19세기 후반 대학과 신학교는 농노제 비판과 공화주의 사상의 온상이 되었다.
고등교육 기관으로는 1756년 세워진 인터그라드 제국대학, 정교회의 인터그라드·인크론슈타트 신학교, 1861년 국영 병기창과 함께 세워진 크라슬리스크 공과학교가 있었다. 대학 교육은 귀족과 부유한 도시민의 몫이었으나, 19세기 후반 대학과 신학교는 농노제 비판과 공화주의 사상의 온상이 되었다.
9.4. 여성 [편집]
여성은 남편이나 아버지의 신분을 따랐고, 재산 상속에서도 남성보다 불리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인터그라드와 크라슬리스크의 방직공장이 늘어나면서 출가 농노 여성들이 대거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방직공장 여공들은 제정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였으며, 동시에 가장 잘 조직된 노동자이기도 했다. 1917년 3월 장미 혁명을 시작한 것도 인터그라드 방직공장의 여공들이었다.
10. 문화 [편집]
10.1. 민족주의 낭만주의 [편집]
19세기 제정 사랜드의 문화를 지배한 것은 국가가 후원한 민족주의 낭만주의였다. 그 중심에는 제정이 고대 사랜드 제국을 계승했다는 '계승론'이 있었다. 6~7세기에 이주해 온 남슬라브계 사랜드인과 고대 사랜드인 사이의 단절을 메우기 위해, 낭만주의자들은 슬라브인이 평원에 섞여 들면서 고대 제국의 정신을 물려받았다고 주장했다. 차르 정부는 이 계승론을 적극 후원했다. 계승론은 차르의 정통성을 고대까지 끌어올렸고, 농노제를 고대부터 이어진 평원의 자연스러운 질서로 포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계승론은 그리핀, 수문, 고대 운하 같은 고대 제국의 상징을 문학·미술·건축 곳곳에 되살렸다. 고대 사랜드어를 지켜 온 카스탄인은 '살아 있는 고대'로 칭송받았지만, 그것은 카스탄인을 박물관의 유물처럼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했다.
계승론은 그리핀, 수문, 고대 운하 같은 고대 제국의 상징을 문학·미술·건축 곳곳에 되살렸다. 고대 사랜드어를 지켜 온 카스탄인은 '살아 있는 고대'로 칭송받았지만, 그것은 카스탄인을 박물관의 유물처럼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했다.
10.2. 문학 [편집]
사랜드어 근대 문학은 18세기 후반 궁정 시인 바실리예 데스포토비치(1741~1809)의 송시에서 시작되었다. 1818년 사바 크르스티치의 《사랜드어 문법》으로 문어가 표준화된 뒤, 19세기 전반은 낭만주의 시의 시대였다. 시인 요반 라도비치(1798~1866)는 고대 제국과 인터르스키 1세를 노래한 서사시 《그리핀의 아들들》(1829)로 이름을 얻었고, 1841년 국가 〈차르를 위한 기도〉의 가사를 썼다.
19세기 후반에는 낭만주의에 맞서 농노의 현실을 그린 리얼리즘 문학이 나타났다. 소설가 밀로반 디미치(1834~1897)의 《물길》(1872)은 수문을 쥔 영주에게 물을 빼앗긴 한 자드루가의 몰락을 그린 작품으로, 출간 석 달 만에 금서가 되었지만 필사본으로 널리 읽혔다. 디미치는 이 책 때문에 고원으로 유배되었고, 《물길》은 훗날 장미 혁명 세대의 필독서가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낭만주의에 맞서 농노의 현실을 그린 리얼리즘 문학이 나타났다. 소설가 밀로반 디미치(1834~1897)의 《물길》(1872)은 수문을 쥔 영주에게 물을 빼앗긴 한 자드루가의 몰락을 그린 작품으로, 출간 석 달 만에 금서가 되었지만 필사본으로 널리 읽혔다. 디미치는 이 책 때문에 고원으로 유배되었고, 《물길》은 훗날 장미 혁명 세대의 필독서가 되었다.
10.3. 미술과 건축 [편집]
미술에서는 역사화가 낭만주의의 중심이었다. 화가 라자 보이체비치(1822~1888)의 《분수 전쟁》(1861)과 《인터르스키 1세의 대관》(1874)은 국가가 주문해 인터그라드 제국 박물관에 걸린 대작으로, 계승론을 그림으로 옮긴 작품이었다.
건축에서는 고대 제국의 아치형 수로와 그리핀 장식을 차용한 '신고대 양식'이 유행했다. 건축가 콘스탄틴 베레시(1830~1902)가 설계한 인터그라드 제국 박물관(1888)과 크라슬리스크 중앙역(1891)이 대표작이다. 반면 18세기에 건설된 인터그라드 도심의 궁전과 관청은 서방 바로크 양식을 따랐는데, 신고대 양식의 유행은 이 '서방풍'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건축에서는 고대 제국의 아치형 수로와 그리핀 장식을 차용한 '신고대 양식'이 유행했다. 건축가 콘스탄틴 베레시(1830~1902)가 설계한 인터그라드 제국 박물관(1888)과 크라슬리스크 중앙역(1891)이 대표작이다. 반면 18세기에 건설된 인터그라드 도심의 궁전과 관청은 서방 바로크 양식을 따랐는데, 신고대 양식의 유행은 이 '서방풍'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10.4. 음악 [편집]
음악은 정교회 성가와 평원의 민요에 뿌리를 두었다. 작곡가 드라구틴 마르코비치(1803~1874)는 1841년 국가 〈차르를 위한 기도〉를 작곡했고, 인터르스키 1세의 건국을 그린 오페라 《인터르스키》(1852)로 사랜드 민족 오페라의 시작을 열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카스탄 산지의 민요를 채록해 관현악에 끌어들이는 작업이 유행했다.
10.5. 고고학과 역사학 [편집]
계승론은 고고학과 역사학을 국가 사업으로 만들었다. 역사가 일라리온 루바르다(1791~1859)의 《사랜드 민족사》(1834~1851, 전 6권)는 고대 제국에서 제정까지를 끊김 없는 하나의 역사로 서술한 책으로, 제정 말기까지 학교 교과서의 바탕이 되었다. 1873년부터 국가 주도로 고대 제국의 왕도 유적 타르샨이 발굴되었고, 이곳에서 출토된 그리핀 인장은 차르의 대관식에 쓰였다.
10.6. 검열과 저항 [편집]
제정은 내무부 검열국을 통해 모든 출판물을 사전 검열했다. 농노제와 차르의 권위를 비판하는 글은 출간될 수 없었고, 외국 서적은 국경에서 검사를 받았다. 그럼에도 금서는 신학교와 대학, 노동자 공제회의 야학을 통해 돌았다. 인터그라드 노동자 공제회가 장례와 파업 때 가슴에 달던 붉은 장미는, 1917년 장미 혁명에서 혁명 전체의 상징이 되었다.
11. 군사 [편집]
상세 내용은 사랜드 제국군 문서 참고.
사랜드 제국군은 육군, 해군, 1912년 창설된 항공대로 이루어졌다. 그 중심은 육군이었다. 육군은 영지마다 할당된 인원을 영주가 골라 보내는 농노 징집병을 바탕으로 했는데, 복무 기간은 1712년 상비군 창설 때의 종신에서 1801년 25년, 1859년 15년, 1888년 10년으로 차츰 줄어들었다. 이 밖에 차르를 호위하는 그리핀 근위대, 카스탄 산지 자유민의 산지 기병대, 고원인의 고원 기병 연대가 있었다.
제정 군대는 1784년 고원 병합에서 정점에 올랐다가, 1854~1856년 서부 전쟁에서 라 마베라에 패하며 낙후를 드러냈다. 페타르 3세의 개혁으로 국영 병기창과 철도가 들어서고 참모 제도가 정비되었지만, 장교단은 귀족이, 병사는 농노가 채우는 구조는 끝까지 바뀌지 않았다. 해군은 남부 해안의 자톤에 본거지를 둔 남부 함대와 1862년 이후의 푹하이 분견대가 전부였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제국군은 동원 병력 약 480만 명으로 서부 전선에서 라 마베라와 싸웠다. 서부 전쟁에서 잃은 벨라 강 서안을 되찾으려던 공세는 1914년 12월 벨라 강 전투 이후 참호전으로 굳었고, 1916년까지 전사·실종자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1917년 3월 인터그라드 수비대 일부가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제국군은 제정을 지키는 대신 무너뜨리는 쪽에 섰고, 장미 혁명 뒤 임시정부의 군대로 넘어갔다.
12. 여담 [편집]
- 1,206년이라는 존속 기간은 해협의 군주국 가운데 손꼽히게 길다. 다만 이 가운데 32년의 몽골 점령기와 14년의 혼란기에는 차르가 없었다.
- 수도를 인터그라드로 옮긴 뒤에도 대관식만은 옛 수도 인크론슈타트에서 열었다. 새 차르는 대관식 날 고대 수로의 수문을 손수 열었는데, 마지막 차르 라자르 2세의 대관식이 열린 1894년에는 수문이 녹슬어 열리지 않아 기술자들이 밤새 기름을 먹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 국장의 그리핀이 쥔 수문 열쇠는 1858년 문장 개혁 때 처음 그려 넣은 것이다. 1873년 타르샨 유적에서 열쇠를 쥔 그리핀 인장이 출토되자 계승론자들은 이를 '고대의 증명'으로 내세웠지만, 비판자들은 발굴 결과가 지나치게 문장과 맞아떨어진다며 연출을 의심했다.
- 제정 시기의 사랜드어 철자는 1919년에 개정되었기 때문에, 장미 혁명 직후의 신문과 포고문에서는 옛 철자와 새 철자가 뒤섞여 쓰였다.
- 사비에트 시기에 '제정'이라는 말은 농노제와 전제정의 동의어로 쓰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사비에트에서도 제정 시기의 문학과 건축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일어, 인터그라드 제국 박물관은 2004년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1] 상선기로서는 1731년부터 사용되었다.[2] "보그 추바 살란드!"로 읽는다. 1919년 철자 개정 이후의 표기는 'Бог чува Саланд!'이다.[3] 1784년 병합. 1952년 고랜드로 명목상 독립.[4] 농노제를 법으로 확정했다.[5] 1627년 강화 이후 롱 강이 국경이었다.[6] 1907년 《국가기본법》이 공포되고 의회가 열렸으나 차르가 의회를 수시로 해산해 사실상 전제정이 이어졌다.[7] 공식 칭호는 전사랜드의 차르이자 전제자(Царь и Самодржацъ свесаландскій).[8] 1919년 철자 개정 이전 표기.